SI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이 많으실 수도 있습니다.
A. 스타트업은 모두 평등하다.
스타트업이라고 모두 평등한 건 없습니다.
직위가 없이 서로 이름 혹은 영문명으로 부른다고 해서 모두 평등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사장님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외국에서는 직위, 즉 매니저냐 디벨로퍼냐 하는 포지션에 따라 하는 일이 정해지기도 하고 매니저라고 디벨로퍼의 상위에 있는 경우는 아니라고 말은 들었습니다.
다만 그건 원래 나이나 서열을 크게 따지지 않는 세상 사람들 이야기이고,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두 명만 있어도 서로 서열을 정하려고 기 싸움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서열제로 계속 살아왔으니까요.
B. 만들고 싶은 제품을 만든다.
아니요. 스타트업은 돈 내는 사람이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겁니다. 개발자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게 아닙니다. SI랑 별 차이 없습니다.
C. 기술 스택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시니어 개발자의 경우 기술 스택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니어 개발자도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기술 스택을 제안할 수 있는 분위기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술 스택이라는 건 뭘 만들지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하는 거지 내가 사용해보고 싶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CTO가 있다면 CTO가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여러분이 아닙니다.
D. 스타트업과 단합
스타트업에서 단합은 잘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스타트업이라서 딱히 단합이 잘 되는 건 아닙니다. 그냥 크기가 작으니까 모두 모여서 뭔가를 하기 좋은 구조인 겁니다.
3명이 모여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100명이 모두 모여서 점심을 먹으려면 일단 1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부터 알아봐야 하는 이치랑 똑같습니다.
단합은 사람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는 아닙니다.
5. 작으면 기민하다.
크기와 속도는 비례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직이 작다는 건, 방향을 빠르게 선회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조직이 작으므로 지원 조직이 따로 없습니다. 다 직접 해야 합니다.
전화도 직접 받고 커피도 직접 사러 가야 하고 인사 세무 회계 등 경영적인 업무나 서버 등 인프라적인 부분도 직접 만져야 하고 (클라우드를 쓴다고 모두 다 자동인 건 아닙니다. 물론 반자동화되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모두 다 알아서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직접 실무를 하시는 분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장애도 직접 대응해야 합니다.
즉 개발 외에 수많은 항목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스타트업입니다.
의외로 큰 기업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도는 회사 분위기와 시스템 문제이지 크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6. 급여가 많다.
가장 크게 착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스타트업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냥 소기업입니다. 시작한 지 별로 안 되었고, 크기가 작다는 뜻입니다.
어디선가 투자를 받았거나 별도의 캐시카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 이상 스타트업 멤버의 월급은 대부분 창업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돈에서 나옵니다.
한정적인 금액을 가지고 빨리 돈이 들어오기 시작해야 하는 스타트업의 운명에서 월급을 많이 주고 조금의 잉여 인력 정도는 괜찮다는 말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월급이 많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월급보다 훨씬 많아야 합니다.
스타트업은 인상할 수 있는 월급의 한계가 있으므로 지분 쉐어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잘 되면 회사의 가치가 오를 테니 지금은 월급이 적더라도 미래를 위해 열심히 하자는 취지입니다.
7. 야근을 하지 않는다.
야근은 어디나 다 합니다. 일이 많을 수도 있고 야간 운영 시스템 배포 등이 있을 수도 있고 새벽 세시에 장애 터져서 자다 말고 일어나서 일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큰 기업은 대응할 인력이 상주하거나 교대근무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스타트업은 그런 거 없습니다. 내가 작성한 코드 나밖에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백업 인원을 둘 만큼 여유가 있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스타트업의 다른 이름은 믹서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제품에 직원들을 갈아 넣어서요.